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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름 |
설태수 |
작성일시 |
2013-09-25 14:17: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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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山草, 심심하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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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블레이크와 중도(中道)
설 태 수
Ⅰ
인간은 오관으로 현상계를 감지한다. 있고(有) 없는(無) 것에 대한 인식부터 거론해본다면, 눈에 보이거나 안 보이는 것이 그 판단의 기준이 된다. 이러한 인식은 사실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잘못된 인식도 아니다. 생과 사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다. 숨이 붙어있고 없고를 기준으로 생사관계를 확연하게 나누고 있다. 이 또한 잘못된 인식이라고 할 수 없으며 지극히 현실적이고 객관적 판단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이처럼 감각에 토대를 둔 인식과 그에 따른 판단에 오래 길들여져 있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익숙하게 된다는 점이다. 문제는 바로, 그런 관점으로 인하여 존재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있음과 없음, 생과 사는 서로 양 극단의 관계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있음에 집착하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 감각의 세계로부터 멀어지는 소멸의 세계를 본능적으로 기피하고 있는 것이다. 있음과 없음이 다를 바 없고 생과 사가 한 몸이라는 인식이 깊이 있게 우리 내면에 깔려있다면, 즉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뛰어넘을 수 있는 통찰력이 투철하다면, 우리는 있고 없음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을 수 있고,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비켜있을 수 있을 것이다. 시각적 감각으로는 유와 무, 생과 사가 확연한 양극관계 속에 있으나, 깨달음을 얻은 안목으로 볼 때에는 이들의 관계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불교의 중도(中道)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중도적 인식으로 보면 생과 사, 유와 무의 어느 한 쪽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경우, 그의 시세계에는 이와 같은 맥락의 중도적 세계관이 드러나 있다. 현상계와 영원과의 관계라든지 존재의 각 구성원들 간의 연결고리에 대한 그의 인식에는 중도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적지 않게 깔려있다. 그러므로 본 논문에서는 블레이크의 세계관과 불교의 중도 사이에는 어떠한 유사성이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먼저 중도에 대한 개념 파악을 하고난 후 블레이크 시에 내포된 중도적 요소를 일별해보고자 한다.
Ⅱ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중도는 중간, 즉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이라는 의미가 아니다(성철 97). 그런 점에서 어느 한 쪽에 치우침이 없음을 강조하는 유가(儒家)의 중용(中庸)과는 다르다. 중용의 경우, 부족하거나 지나치지 않도록 ‘양 극단을 파악하여 중간을 택하는’(執其兩端用其中)(한상갑 376) 것이지만 중도는 양 극단을 포함해서 중간에도 머물지 않는 원융무애(圓融無碍)의 세계인 것이다. 굳이 현실적으로 풀이해본다면, 동서남북 사방으로 분포되어 있는 숱한 집에 이를 수 있도록 훤하게 뚫려있는 중앙도로를 중도에 비유할 수 있다. 그것은 그와 같은 중앙로 덕에 사통팔달로 구석구석 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서남북과 시방(十方)세계의 어떤 극단에도 통하는 중앙로가 중도에 비유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중도는 우리 몸의 이치에도 비유될 수 있다. 입 식도 위 장 항문으로 이어지는 중앙통로를 기준으로 좌우 팔다리에서 머리카락과 발톱까지 몸 구석구석에 영양이 공급될 수 있는 것은 항상 뚫려있는 중앙 소화기관의 순환성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어떤 한 종류의 음식에 소화기관이 집착해버려서 순환되지 못한다면 몸은 제 기능을 잃게 된다. 필요할 때마다 지수화풍(地水火風)에 통하는 몸은 상극관계인 물과 불 모두를 취해서 유지되고 있다. 몸에 중도의 이치가 이미 녹아있는 것이다. 따라서 천지의 기운과 더불어 항상 순환될 수 있도록 열려있는 몸 덕분에 인생이 펼쳐질 수 있다. 몸의 여러 장기가 각기 고유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도 몸의 중도 기능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환계 속에 있는 삼라만상에도 이와 똑같은 원리가 적용되고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유(有)와 무(無), 생과 사의 관계에도 중도가 상존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생명체의 수명이나 물체의 존속기간이라는 것은, 각 개체가 무화(無化)되는 기간을 말한다. 마모되고 소멸되어가는 무화과정이 없으면 존재(有)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유와 무의 세계가 상극관계로 보이지만, 사실은 개체의 발생(有)과 동시에 무화(無)가 내재하므로 동전의 양면 같은 이 둘을 중도가 아우르고 있는 셈이 된다. 이러한 이치는 현상계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의 세계에도 공히 적용되는 것으로서, 불교에서는 중도가 깨달음의 방편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중도를 심리, 철학 및 종교적 개념에 적용시켜본다면 중도에 내포되어 있는 여러 의미가 어렵지 않게 풀릴 수 있을 것이다. 사랑과 미움, 미(美)와 추(醜), 천국과 지옥 같은 양극을 이루는 세계가 중도적 관점으로 보면, 서로서로 잘 통하고 있다는 것이며 크게 보면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블레이크 시에도 같은 맥락의 구절이 있다.
상반성이 없이는 진전이 없다. 끌어당김과 반발,
이성과 에너지, 사랑과 미움, 등은 인간 존재에
필수적이다.
Without contraries is no progression. Attraction and
repulsion, reason and energy, love and hate, are
necessary to human existence.
("The Marriage of Heaven and Hell", 3: 7-9.)
예를 들면, 땅에서 걸을 수 있고 물에서 배가 갈 수 있는 것은 저항이라는 마찰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서로 상반성이 작용하기에 존속할 수 있다. 상대적인 두 세계가 맞물린 융합된 모습으로 진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도 세계가 펼쳐지고 있는 셈이 된다. 이와 관련된 성철 선사의 설법을 들어보자.
중도 사상은 철학적인 면에 있어서나 실천면에 있어서나 모순 상극된 상대적인 차별을 다 버리고 모든 것이 융합된 절대 원융자재한 대원리이다. (성철 76)
중도는 모든 양 극단을 떠나며 또한 양 극단이 서로 원융하게 통하는 것이다. (성철 111)
여기에서 ‘상대적인 차별’이라는 것은 사랑이나 미움, 있음이나 없음, 생이나 사와 같은 양극의 어느 한 변에 집착하는 데서 발생하는 성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것은 삼라만상의 순환원리와 아주 동떨어진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중도의 기본적인 형태는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있음과 없음, 생함(生)과 멸함(滅) 등 상대적인 어떤 두 극단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성철 87)
현상계가 어떤 한 모습에 집착함이 없이 변화하고 있듯이 정신세계도 순환성으로 열려 있어야 진정으로 생명력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있음이나 없음, 생과 멸 어느 하나에 집착한다는 것은 천지자연의 이치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상계(色)라는 것은 끊임없는 생성소멸 작용인 공성(空性)이라는 변화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성이라는 것은 비가시적이며 오감으로 느낄 수 없다는 점에서 공(空)이라 하며, 그렇기에 ‘현상계는 공하다’고 하는 ‘색즉시공’(色卽是空)이란 용어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어는 것이든 매순간 똑같은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다시 말하면,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점에서 ‘무아(無我)의 상태가 바로 현상계의 본모습’(諸法無我)인 것이다. 불교에서 중도를 공이라고 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불성(佛性)을 중도라고도 하는데 이에 대한 언급을 보자.
불성은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며, 또한 있는 것이며 또한 없는 것이니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합하는 까닭에 중도라고 한다. (「열반경」, 성철 78)
그러니까 중도라는 것은 유와 무, 생과 멸에 미치지 않는 바 없으면서 동시에 그 어느 것에도 붙들려있지 않은 불이(不二)의 개념이기 때문에 수행의 방편으로 차용되고 있다. 그러나 수행과 관련된 중도는 필자가 언급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나므로 이에 관한 내용은 본 논문에서 보류해두고자 한다.
중도에 관한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평등과 연기’이라는 것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도는 어떤 경우에는 유(有)에 의지하고 어떤 경우에는 무(無)에 의지하면서 동시에 단견(斷見: 세상과 자아가 사후에 없어진다는 견해)과 상견(常見: 세상과 자아가 사후에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견해)을 여의고 중정(中正: 곧고 올바름)을 취하는 것이다. 이처럼 두 가지를 모두 여읜다는 것은 두 가지를 모두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을 포함하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중도는 평등이다. 두루두루 취하고 포함하는 것이다. 그래서 중도에는 반드시 연기(緣起)의 법칙이 게재되어 있다. (김호귀 168-69)
중도라는 것이 절대 평등 및 연기와 상통한다는 것이다. 중도의 관점에서 평등이란, 각 개체와 존재 간에 우열관계가 없음을 뜻한다. 사물의 겉모습이 아니라 본질적인 작용, 즉 공성의 시각에서는 삼라만상이 절대 평등관계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연기의 뜻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김으로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죽으므로 저것이 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만물은 원래부터 한 뿌리이기 때문’(성철 1984년 법어)이라는 것이다. 사통팔달로 존재에 두루두루 미치고 있는 것이 중도이므로 연기법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중도의 이러한 성격이 좀 더 실감 있게 표출된 시(詩)가 있다. 성찬경 시인의 장시(長詩) 「그물」 중 제6장을 인용하겠다.
하늘의 그물. 파동의 그물. 산더미만한 괴어(怪魚)를 집어삼키고도 흔적도 없다. 진(秦)도 로마도 해뜨기 전 이슬처럼 반짝했을 따름이다. 폼페이의 굉음도 일순(一瞬)일 뿐 다시 시퍼런 침묵의 심연이다. 의인(義人)의 피가 강으로 흘러도 침묵은 이어지다가 몇 백 년 후 죽은 그루터기에 새싹이 튼다.
한번 파동이 일면 그 흔적의 꼬리는 끝없이 길다. 어루만지듯 출렁이다가 저쪽에서 오는 파동과 마주쳐 서로 미묘한 굴곡으로 간섭한다. 다시 헤어져 가다가 이번에는 더 뜨거운 파동과 만나 얼싸안고 서로 애무한다. 다시 여울 따라 가다가 파동의 대회의(大會議)에 접근해서 사납게 쏠려 성난 소용돌이로 솟아 해일 되어 뭍을 세게 때리고는 다시 무심히 피라미의 꼬리만큼 출렁이며 자장가를 부른다. 달빛 아래 일파(一波)가 만파(萬波)이다. 이쪽에서 쑤시면 저쪽에서 불룩 솟고 동(東)에서 휘저으면 서(西)에서 폭발한다. 사랑이 미움으로 미움이 사랑으로 바뀌는 모습이 그야말로 몽환적이다. 투쟁 저항 충돌 협상 합세 야합 흡수 공중분해 평행 교차 균형 합주 대조 조화 등 모든 역학현상(力學現象)의 총집합장이다.
모든 그물을 덮는 그물. 모든 그물을 한 그물이 되게 하는 이 하늘의 그물은 처음도 없이 끝도 없이 과연 얼마나 엄청나게 크단 말인가. 일구일점(一句一點)의 어김도 없이 얼마나 얼마나 엄정하고 정묘(精妙)하게 출렁이고 있단 말인가. (성찬경 72-73)
그러므로 중도 정신은 현상계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의 범주를 아무런 걸림 없이 아우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Ⅲ
앞서 진술한 중도적 관점은 블레이크의 시에서도 상당 부분 통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바, 우선 그의 “Jerusalem”의 일부를 살펴보겠다.
금과 보석으로 된 여러 수레에는 살아있는 피조물들이 온갖 색채로 별처럼 빛나고 눈부신데, 사자, 범, 말, 코끼리, 독수리, 비둘기, 파리, 벌레, 그리고 너무나 놀라운 뱀은 보석과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되어, 인간화하고 있다.
On Chariots of gold & jewels, with Living Creatures, starry & flaming
With every Colour, Lion, Tyger, Horse, Elephant, Eagle, Dove, Fly, Worm
And the all wondrous Serpent clothed in gems & rich array, Humanize.
("Jerusalem", 98: 42-44.)
인간의 창조적 상상력이 이성(理性)의 억압에서 벗어날 때 세계는 새롭게 깨어난 모습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짐승과 벌레 이외에도 뱀까지 보석 빛깔로 반짝이는 모습으로 인간화한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나무 광물 돌마저 이와 다르지 않다고 한다.
모든 형태들, 심지어 나무, 금속, 흙, 돌조차도 인간화되었다: 모든
인간화된 형상들이 살아서 나아가고 지쳐서 수많은 해, 달, 날, 그리고 시간이라는 지상의 삶 속으로 돌아가; 쉬고 나서는
불멸의 생명력을 지닌 가슴 속으로 깨어난다.
All Human Forms identified, even Tree, Metal, Earth & Stone. All Human Forms identified, living, going forth & returning wearied Into the planetary lives of years, Months, Days & Hours; reposing And then awaking into his bosom in the life of Immortality.
("Jerusalem", 99: 1-4.)
여기에서 블레이크가 말하는 ‘인간화’라는 것은 ‘진정한 상상력을 지닌 참된 인간으로서 시적(詩的) 천재’(Durr 13)를 뜻하며, 구체적으로는 예수를 의미하고 있다. 그에게는 예수가 오관의 감각 능력 이상의 것을 지닌 시적 천재로 상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적 천재’라는 개념은 육체의 감각작용에 제한 받지 않고 사물의 무한 실상을 보고자 하는 시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언급에 대한 반발도 있다. ‘용어가 다소 난해하다’(Frye 19)는 것이 그 이유이다. 이에 관하여 블레이크는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시적 천재’(오늘날 그렇게 부르듯이)는 제일의 원리이며
그 밖의 모든 것은 단지 이에 종속되는 것이라고 우리
이스라엘은 가르쳤다.
We
of Israel taught that the Poetic Genius (as you now call
it) was the first principle, and all the others merely de-
rivative,
("The Marriage of Heaven and Hell", 12: 35-38.)
따라서 ‘시적 천재’를 예수로 인식하고 있는 블레이크에게는 모든 개체 속에서 ‘신성한 예수’의 이미지를 통찰한다는 것이 결코 지나친 표현은 아니다. 그 구절을 보자.
총체적 형상들은 그들 각각 생기를 지니고 있고, 낱낱의 개체는
인간이면서, 신성한 예수라는 성스러운 구성원이다!
General forms have their vitality in particulars: & every
Particular is a man; a divine member of the Divine Jesus!
("Jerusalem", 91: 29-30.)
진정한 상상력을 통하여 블레이크는 삼라만상 하나하나에 내재해 있는 신성한 예수를 지각(知覺)하고 있다. 예수가 인간의 모습으로 지상에 왔음을 인정한다면 결국 존재하는 구성 원자 모두가 우리와 한 가족이라는 것이 그의 세계관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블레이크의 상상력이라는 것이 ‘신(神)과 상상력은 하나이며, 신이란 인간에 내재하는 창조력과 정신적 힘’(Bowra 34)이라는 설명은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깨달음이 녹아있는 시적 상상력으로 보면, 존재하는 각각이 신성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 구성원들 간에 장애물은 없으며 서로서로 다양한 방식으로 통한다고 할 수 있다. “낱낱의 미세한 것들도 거룩하다”("Jerusalem", 69: 42.)고 인식하는 블레이크의 안목은 심원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은 안팎으로 존재하며, 심지어 지옥의 심연 속에도 그가 있다.
God is within & without;; he is even in the depths of hell. ("Jerusalem", 12: 15.)
지옥 속에도 하느님이 존재하고 있다고 그는 선언하였다. 낱낱의 존재, 나아가 지옥에도 신성(神性)이 깃들어있다는 것은 불교의 ‘모든 것에 불성이 있다’(皆悉有佛性)는 구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는 ‘불성이 곧 중도’(성철 46)라는 관점에서 볼 때, 있음과 없음, 생과 사, 천국과 지옥 등 양극의 어디에나 막힘없이 두루 통하는 중도 정신의 절대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블레이크의 이런 상상력은 불교의 연기(緣起)를 연상시킴직한 다음의 시구와 연결될 수 있다.
종달새가 날개를 다치면
천사도 노래하기를 그친다
싸움하도록 깃털 잘린 투계는
떠오르는 태양을 위협한다
이리와 사자의 울부짖음 하나하나가
지옥으로부터 인간의 영혼을 치솟게 한다
이리저리 헤매이는 야생 사슴은
인간의 영혼을 근심에서 해방시킨다 (이재호 옮김)
A Skylark wounded in the wing
A Cherubim does cease to sing
The Game Cock clipd & armd for fight
Does the Rising Sun affright
Every Wolfs & Lions howl
Raises from Hell a Human Soul
The wild deer wandring here & there
Keeps the Human Soul from care
("Auguries of Innocence", 15-22.)
천상계를 포함한 모든 존재가 하나의 그물망, 즉 연기적 성격을 지닌 한 가족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절절하게 노래하고 있는 시구이다. “우리 가정과 사회, 사회와 국가, 지구와 태양계, 하나의 성단을 이루는 수많은 별들은 모두 끈으로 묶이고 얽혀있는 것 같은 관계”(이시우 교수) 라고 언급한 천문학자의 주장도 이와 같은 맥락을 이루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타자가 겪는 고통이 나의 고통과 무관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이에 대하여 “다른 사람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된다는 것은, 그때 우리 안에 숨겨진 신성(神性)이 드러났다는 것이 된다”(배철현 교수)는 해설도 위 시를 충분히 뒷받침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랑’에 해당되는 불교의 ‘자비’(慈悲)라는 어휘에서 슬플 ‘悲’의 의미에 ‘어미가 새끼를 가엽게 바라보는 마음’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도 ‘신성’과 통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세계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이 있다.
우리 피조물들은 하나의 인간으로 산다; 우리의 무한한 감각들을 수축시켜 다수를 보며; 혹은 감각들을 확산시켜, 우리는 하나로서 바라본다, 온 우주의 가족을 하나의 인간으로서, 그리고 그 한 인간을 우리는 구세주인 예수로 부른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 안에, 우리는 그 안에서 완벽한 조화로 산다, 생명의 땅인, 에덴에서, 주고받으며, 그리고 서로 서로의 죄를 용서하면서.
We live as One Man; for contracting our infinite senses
We behold multitude; or expanding, we behold as one,
As One Man all the Universal Family, and that One Man
We call Jesus the Christ; and he in us, and we in him
Live in perfect harmony in Eden, the land of life,
Giving, receiving, and forgiving each other's trespasses.
("Jerusalem", 34: 17-22.)
능소능대(能小能大)가 자유자재(自由自在)한 창조적 상상력으로 보면 모든 존재가 한 가족이며 같은 살붙이임을 거듭 실감하게 된다. 특히 ‘우리의 무한한 감각들을 수축시켜/ 다수를 보며, 혹은 감각들을 확산시켜 우리는 하나로서 바라본다’는 구절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미시적(微視的)이면서 동시에 거시적(巨視的) 통찰력이 작용하고 있는 블레이크의 상상력은 정교하면서도 우주와 천계를 아우르고 있다. 좀 더 쉬운 예를 든다면,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장기와 세포들이 각각 고유의 역할을 함으로써 온전한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상의 세계와 온 우주, 더 나아가서 있음과 없음, 생과 멸, 천국과 지옥 같은 형이상학적 세계도 대동소이한 원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그의 관점이다. 이러한 성격의 창조적 상상력은 앞서 살펴본 불교의 중도와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 속에 존재하는 삼라만상, 심지어 티끌 하나도 영원과 사랑 속에 있다는 뜻의 “영원은 시간의 산물(産物)들과 사랑에 빠져있다”(Eternity is in love with the productions of Time.)("The Marriage of Heaven and Hell", 7: 10.)는 블레이크의 오도송(悟道頌)은 전혀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Ⅳ
불교의 중도와 블레이크의 창조적 상상력은 각기 다른 종교적 뿌리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불성(佛性) 및 공(空)과 같은 의미로 쓰이는 중도는 양극의 세계를 통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중간에도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중도의 이치는 온 우주의 두두물물(頭頭物物)에 미치지 않는 바 없으며, 형이상학의 세계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도를 터득했다는 것은 스스로 불성을 지닌 부처임을 자각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럴 경우, 존재 전부가 곧 나와 한 몸이므로 어느 한 개체의 고통은 나의 고통에 직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는 형이상학의 세계에도 그대로 통하므로 번뇌가 보리(菩提: 깨달음)이고 극락과 지옥도 하나로 볼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블레이크의 창조적 상상력이란 그 원천이 기독교이다. 영원의 존재인 전지전능한 하느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지상에 온 예수를 블레이크는 ‘시적 천재’로 인식하였다. 창조주 하느님이 예수의 모습으로 현신하였기 때문에 창조적 상상력을 지녀야만 비로소 낱낱의 개체와 전 우주적 존재에 현현(顯現)한 신의 섭리를 통찰할 수 있다는 것이 된다. 피조물마다 창조주의 입김이 녹아있다는 점에서 볼 때 존재의 모든 구성 원자는 형태만 달리 할 뿐,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 블레이크의 세계관이다. 이같은 그의 인식은 “천국과 지옥의 혼인”(The Marriage of Heaven and Hell)이라는 시 제목만 보아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도처에 신성(神性)이 내재해있음을 막힘없이 두루 간파한 그의 안목이 놀랍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중도와 창조적 상상력은 각각의 종교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결론 내릴 수 있다. 높은 산의 정상을 오르는 길은 많아도 정점(頂點)은 하나이듯이, 표현 방식은 각기 달라도 드높은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서로 통하는 게 아닐까 한다. 게다가 깨달음을 통한 이러한 통합적 안목을 회복한다면 지금 이 시대의 이원화 및 파편화된 사고방식을 치유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좁은 시야에 사로잡혀 분별심에 붙들린 나머지 숱한 다툼과 탐욕들이 아집(我執)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성이나 신성을 중도 정신 혹은 창조적 상상력으로 터득한다면 차별지를 벗어난 절대 자유를 누구나 누릴 수 있으리라는 짐작이 든다.
주제어
불교, 중도(中道), 불성(佛性), 공(空), 윌리엄 블레이크, 창조적 상상력, 신성(神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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